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베 신조 (문단 편집) == 개요 == [[일본]]의 [[정치인]]. 제90·96·97·98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제2차 세계 대전|전후]] 세대 출신의 첫 번째 총리이자 전후 최연소 총리[* 2006년 9월, 1차 내각총리대신 취임 당시 52세. [[메이지 유신]] 이후의 모든 총리들로 범위를 넓힌다면 3위인데, 초대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가 최연소 총리이다. 그리고 2번째 최연소 총리는 [[고노에 후미마로]]([[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전범 재판 직전에 자살한 인물).], 그리고 '''역대 최장 기간 집권한 일본 총리'''[* [[1868년]] [[메이지 유신]]과 함께 일본의 [[입헌군주제|입헌군주정]]이 시작되었고, [[1885년]] [[내각제]]가 시행되면서 [[일본 내각총리대신]] 직책도 창설되었다. 통산 '''3,188일(8년 7개월)''' 간을 재임하며 '''역대 최장수 집권 총리'''와 '''역대 최장 연속 재임 기록'''을 보유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역대 최장수 집권 총리 기록은 약 '''110여 년 만에 경신'''된 것이다. 기존 최고 기록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가쓰라 다로]] 전 총리의 2,822일(7년 7개월).] 기록을 보유한 인물. 또한, [[헤이세이 시대]]의 마지막 총리이자 [[레이와 시대]]의 첫 총리이기도 하다. 2006년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뒤를 이어 처음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제1차 아베 내각) 그러나 지나치게 빨랐던[* 3선 의원이었던 2003년(당시 49세)에 [[자민당]] '''간사장'''으로 발탁되었고, 5선 의원이던 2006년에 총리가 되었다. 간사장 직만 해도, 당 대표이자 정부 수반인 총리를 제외하고, '''자민당 내 실질적인 최고위 직책'''이다. 전임 간사장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당 내 최고 원로급 의원들 혹은 곧 총리 취임이 유력한 실력자들이 맡았던 자리였다. 총리를 지냈던 [[기시 노부스케]]의 딸이자 아베 신조의 모친인 요코 여사가 자신의 아들이 젊은 나이에 간사장으로 발탁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신조는 [[아베 신타로|남편]]보다 14살이나 젊은 나이에 간사장이 되었다. 출세의 계단을 지나치게 빨리 올라가는 게 걱정이다.”'''라고 말했을 정도.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09480|관련 기사]]. 일본 정치 역사상 보기 드문 초고속 출세 사례.][* 이렇게 초고속으로 간사장과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된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납북 일본인]] 문제에서의 활약상'''이었다. 아베 신조는 [[1990년대]]부터 '''대북 강경론'''을 주도해 왔고, [[2002년]] 9월의 북일정상회담 당시 일본인 납치 피해자 5명이 [[북한]]에서 '''일시 귀국''' 형태로 일본에 돌아갔을 때 대북 유화론자들의 납치 피해자 반환 주장을 저지하고, 북한과의 약속을 파기해 납치 피해자들의 '''영구 귀국'''을 관철해내는 일련의 정치적 활약상을 통해 일본 국민들로부터 '''일거에 폭발적인 정치적 인기'''를 얻었다.[[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23343|아베 신조와 납북자 문제에 관한 스토리]] [[https://news.joins.com/article/14979099|스토리 2]] 그 인기를 감안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3선 의원에 불과한 그를 자민당 간사장에 중용했고, 약 3년 뒤인 5선 의원 시절 총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정치적 성공 탓인지 여러 문제점들을 노출하며 권위가 실추된 데다 [[궤양성 대장염|건강상의 문제]]가 겹쳐, 단 1년 만에 총리직을 사퇴하면서 단명 총리로 남았다.[* 2017년 아내 [[아베 아키에]]가 한국 [[동아일보]]와 나눈 [[http://news.donga.com/3/all/20170207/82744785/1|인터뷰]]에 의하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로 이 무렵을 지목했다. 당시에는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상당히 괴로웠다고.] 하지만 이후 [[자민당]] 출신의 후임 총리들[* [[후쿠다 야스오]], [[아소 다로]].]도 1년 이하의 임기로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일본 1998년)|민주당]]에 정권을 내주었고, 민주당 총리들[* [[하토야마 유키오]], [[간 나오토]], [[노다 요시히코]].] 역시 단명 내각을 이끌며 3년 만에 지지율이 급전직하하였다. 결국 2012년 12월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의 승리로 정권 교체에 성공, 총리직에 복귀하며 정치적 재기에 성공했다.(제2차 아베 내각) 2년 뒤인 2014년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와 3년 뒤인 2017년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압도적 다수 의석을 그대로 유지하여 정권을 연장했다.(제3, 4차 아베 내각) 정치적 측면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임기 종료 이후 약 7년간 회전문 총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불안정했던 일본의 [[내각제]]를 자신의 탄탄한 지지율을 기반으로 안정시켰다.[* 여담으로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일본 언론들은 [[대통령제]]의 단점에 주목하는 기사를 많이 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회전문 총리 시기에는 내각제의 단점을 까며 일본도 실권자인 총리에게 강력한 권력을 부여해야 국정 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며 대통령제를 도입해야 된다는 기사가 심심찮게 나오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자민당 내 거물 정치인들이 자기 파벌을 하나씩 쥐고 있는 반면, 아베는 파벌의 회장이 아니다. [[아소 다로]]는 [[지공회]], [[기시다 후미오]]는 [[굉지회]], [[니카이 도시히로]]는 [[지수회]]의 영수이지만, 아베는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인 [[세이와 정책연구회]]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사실상 본인이 회장이나 다름없는 실세임에도 바지사장들을 내세우고 있었다. 본래 [[마치무라 노부타카]]가 회장이던 마치무라 파였으나, 본인의 총리 취임과 함께 마치무라를 파벌을 이탈해야 하는 [[중의원]] 의장으로 보내고 대신 바지사장 [[호소다 히로유키]]를 앉혀 호소다 파로 개창했으나, 여전히 실세는 아베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아베는 명목적으로는 자신의 파벌을 운영하지 않는 행태를 보이며 주변의 견제를 완화시켰다. 결국 아베는 2022년엔 호소다를 중의원 의장으로 보내고 자신이 직접 세이와 정책연구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이러한 안정된 권력 기반을 바탕으로 [[아베노믹스]]라는 이름의 강력한 [[양적 완화]] 정책을 실시하여, 일본의 경제를 상당 수준 활성화하는 데 성공[*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전 세계 주요국들이 [[양적 완화]]를 통해 통화를 팽창시키며 금융 위기에 대응했던 것과 달리, 일본의 민주당 정권은 이에 거의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엔화의 가치가 폭등하고 기업의 실적이 극도로 악화되는 등 전후 최악의 경제 상황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아베와 자민당 내각은 '윤전기를 풀가동하여 엔화를 무제한으로 찍어내겠다'는 강력한 시그널을 전 세계 정치권과 금융권에 주면서,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의 [[주가 지수]]인 [[닛케이 225]]는 민주당 정권 시절이던 취임 초와 비교했을 때 무려 2.1배 이상 상승했다. [[잃어버린 10년/일본|잃어버린 n년]]이 시작된 [[1991년]] 이래 가장 높은 기록인 24,000선을 돌파하기도 했다. 실업률, 전세대의 유효 구인 배율, GDP 수치 등 대부분의 경제 지표들은 아베 내각 기간 동안 줄줄이 신기록을 경신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15/0004015295?sid=001|관련 기사]]]했다. 외교적 측면에선 [[미국]]과 [[서방]] 진영에게, [[중국]], [[러시아]], [[북한]] 등을 위시한 [[제2세계|반 서방 세력]] 견제의 매우 중요한 조력자[* 역대 일본 총리들 중 [[나카소네 야스히로]],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더불어 가장 [[친미]] 성향이 강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아베 신조의 2차 내각 이후는 미국과 서방 세력의 패권이 과거와 달리 중국, 러시아 등 반서방 진영에게 위협 받았던 시점이므로, 아베 신조가 서구 세계 입장에선 나카소네와 고이즈미보다 훨씬 더 고마운 존재로 인식되었다. 당장 아베 2차 내각 직전 일본의 여당이었던 민주당은 미국 대신, 중국과 아시아 중심의 [[친중]] 스탠스로 이동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의 입장에선 상당한 위협이 되는 상황이었다.]로 인식되었다. [[아베노믹스]]나 [[아베 신조/외교 정책#s-3|아베독트린]]이 국제 사회에서 별 잡음없이 통과된 데에는 이같은 배경이 깔려있다고 보면 된다. 반면, [[한국]]과 [[중국]]에서는 아베 신조의 그릇된 역사관을 이유로 들어 대일관계 악화의 원인으로 지목해 비판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2013년에는 과거 [[태평양 전쟁]]을 주도한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기도 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0087|아베 신조 일본 총리,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이재호, 프레시안, 2013-12-26.] 이후에도 계속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봉납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며 주변국의 반발을 불렀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16/2017081600194.html|아베 "야스쿠니 못 가서 미안하다"… 4년째 대리참배·시주]], 김수혜, 조선일보, 2017-08-16][* [[http://hankookilbo.com/v/4a133b9a36da4df1abcdc4aa014b4cfb|아베,야스쿠니신사에 총리명의 공물 봉납]], 박석원, 한국일보, 2017-10-17] 참고로 아베는 일본 최대 극우 단체인 [[일본회의]]의 회원이었다. 군사적 측면에서는 [[일본의 재무장]] 및 군비 증강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신냉전]] 구도의 당사자인 중국은 당연히 이를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을 악화시키는 행동이라 주장하고 있으며, 한국도 이를 일본의 [[군국주의]] 망령이 부활하려는 전조 증상이라며 비판에 가세하는 중이다. [[주요 7개국 정상회담|G7]] 서방국가들의 ‘요구’와 일본 내 우익 세력의 '요구'에 응하여[* 이전부터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일본이 군대를 가질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자신들에게 안보를 의존하는 짠돌이 행태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불만은 [[21세기]] 들어 경제적으로 급격히 성장하여 군사적 팽창을 시도하는 중국과 미국의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연이은]] [[이라크 전쟁|파병 실패]]로 인한 군축을 계기로 폭발했다.] 진행하고 있다. 더욱이 일본의 경기가 나아져 매년 늘어난 [[GDP]]와 세수액 및 예산을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25&aid=0002784393|비교해 본다면]] 비록 매년 증가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1%대 군사비를 지출하는 일본은 오히려 한국(GDP 대비 2.6%)이나 중국(GDP 대비 2.0%)과 비교하였을 때 양호한 수치를 유지하고 있다 볼 수 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6JbAUfVmeS0)]}}}|| 2020년 8월, 1차 사임 당시와 같은 이유인 지병 문제[* 궤양성 대장염. 대장에서 지속적으로 염증과 출혈이 발생하는 병으로, 신약을 쓰는 데도 잘 듣지 않았다고 하며,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주치의의 강력한 권고를 받았다.]로 8년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났으나, 여전히 당내 최대 파벌 [[세이와 정책연구회]]의 영수이자 당내 실세로서 힘을 발휘했고 후임 총리인 [[스가 요시히데]]와 [[기시다 후미오]]를 옹립하는 데에도 깊이 관여했다. 2021년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후 [[세이와 정책연구회|기존 파벌]]의 회장 [[호소다 히로유키]]를 [[중의원]] 의장으로 보내고 자신이 직접 회장에 취임하여 정계 영향력을 과시했으나, 2022년 7월 8일에 터진 [[아베 신조 피살 사건|그 피격 사건]]으로 인해 생을 마감했다.[* 재집권에 성공하여 2차 내각을 구성한 2012년 12월에서 9년 7개월 만이었다. 이로써 일본 역대 내각총리대신 중 7번째로 피살당한 인물이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암살]] 당시 전임), [[하라 다카시]](암살 당시 현직), [[하마구치 오사치]](피격 당시 현직→중상으로 인한 직무불가 상태→후유증으로 이듬해 사망), [[이누카이 츠요시]]([[5.15 사건]], 암살 당시 현직), [[사이토 마코토]]/[[다카하시 고레키요]]([[2.26 사건]], 암살 당시 전직), 아베 신조(암살 당시 전직). [[1930년]] [[하마구치 오사치]] 이후 92년 만에 [[야마가미 데쓰야|민간인]]에 의해 총기로 [[암살]]당한 전/현직 총리이기도 하다.하마구치는 중상을 입고도 1년 가량을 더 생존했으므로 정확히는 암살 미수 사건이다. 일본 국적의 민간인에게 당일 사망한 것은 [[하라 다카시]] 이후 101년 만이다. (야마가미는 해자대 출신이긴 하나 20대 초에 3년만 복무했다.) 참고로 [[이누카이 츠요시]]는 [[일본 제국 해군]] [[위관급 장교]]들에게, [[사이토 마코토]]와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일본 제국 육군]] [[황도파]] 청년 장교들에게 살해당했다. 다만 방금 언급한 세 명 중 현직 총리 신분으로 살해된 인물은 이누카이뿐이고, 사이토와 다카하시는 전직 총리 신분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